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필립 마운트배튼 (문단 편집) ==== 영국의 [[국서]]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19FB1077-1C20-4F0F-9F9B-918612BD069F.jpg|width=100%]]}}} || || '''대관식 직후 엘리자베스 2세와 필립''' || 종전 이후 대내외적으로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느라 골초가 된 [[조지 6세]]의 건강이 계속 악화되자[* 사실 조지 6세는 젊은 시절부터 잔병치레가 많아서 건강한 사람이었다고 보긴 어렵다. 안 그래도 선천적으로 몸이 약한 편인데 전쟁으로 인해 과로와 스트레스, 거기에 줄담배까지 피워댔으니 건강이 정상일 리가 없다.], 추밀원은 1951년 [[엘리자베스 2세]]와 필립을 국왕 대리로 임명했다. 필립은 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해군을 떠나야 했다.[* 필립은 해군을 떠나야 한다는 것에 상심했다고 한다. 총각 시절 전쟁에서 공을 세워서 자기 실력으로 중령까지 달았는데, 느닷없이 반강제로 군을 떠나야 하게 됐기 때문. 사실 해군을 떠나긴 했지만 제대한 것은 아니었으며 기존에 근무하던 호위함 함장을 그만두고 왕실 공무에 투입됐을 뿐이다. 필립은 아내가 즉위한 1952년까지 현역 신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1951년 필립이 호위함 함장을 그만둔 이후 그는 다시는 현역 해군 장교로서의 보직을 받지 못했다. 사실 부군으로써 업무가 너무나 무지막지한지라 신경을 썼는지도 의문이긴 하지만.] 부부는 국왕 대리로서 [[영연방]]을 순방했다. 1952년 2월 6일 [[케냐]]에 체류하는 도중 조지 6세의 사망 소식을 접한 필립은 다른 수행원들을 물리친 후 직접 아내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었고, 이때부터 [[앨버트 공]] 사후 91년만에 등장한 여왕의 부군으로서 필립의 임기도 함께 시작되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M9mHL8CLOC0, width=480, height=280)]}}} || || '''조지 6세의 사망으로 인한 갑작스런 귀국''' || 급히 귀국한 부부의 앞에 놓인 첫 번째 문제는, 왕가의 명칭 변경을 둘러싼 논란이었다. 필립의 삼촌인 [[루이 마운트배튼]] 백작은 "남편의 성씨를 따라 영국 왕가의 명칭이 윈저 왕가에서 마운트배튼 왕가로 바뀌는 것 아닌가"라고 말했지만, [[조지 5세]]의 왕비이자 [[조지 6세]]의 어머니이며 [[엘리자베스 2세]]의 조모로서 아직 생존해 있던 [[테크의 메리|메리 대왕대비]]는 "영국의 왕가는 앞으로 계속 윈저가 될 것"이라고 밝혔으며, 이는 원래부터 합의되어 있던 사항이라고 한다.[* 루이 마운트배튼은 자신이 쓰고 가족과 친구들 사이에게만 유통된 책 <마운트배튼 계보>에서 마운트배튼 가문이 영국을 두 달 동안 통치했다고 주장한다. 그 두달은 여왕이 결혼한 이름으로 통치한 1952년 2월 6일부터 4월 9일까지를 의미한다고 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4월 9일에 [[윈스턴 처칠]]의 조언에 따라 여왕과 그녀의 아이들은 윈저의 이름을 사용하게 됐다고 설명한다.] 필립은 이따금씩 '''"영국에서 자식에게 가문을 물려주지 못하는 남자는 나뿐"'''이라고 자조하고는 했다. 1960년 [[앤드루 앨버트 크리스티안 에드워드|차남 앤드루]]의 출생을 앞두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새로 태어날 아이의 후손, 즉 왕족 직함을 쓰지 않을 미래의 후손들은 성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조지 5세]]의 개봉 칙허장에 따르면 전하의 호칭은 군주의 자녀, 군주의 아들의 자녀, 웨일스 공의 손자의 자녀만 사용할 수 있다. 이 개봉 칙허장에 따르면 [[찰스 3세]]는 메리오너스 백작, [[앤 엘리자베스 앨리스 루이즈|앤 공주]]는 레이디 마운트배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조지 6세]]의 1948년 개봉 칙허장으로 필립과 엘리자베스의 아이들은 전하(H.R.H.)와 Prince or Princess의 호칭을 사용할 수 있었으며 성을 안쓴다.][* 전하 (The Royal Highness)'를 받은 왕족은 성을 안쓴다. 성을 쓰는 The Royal Highness Prince는 필립 뿐이었다.] 여러가지 논의 후, 필립과 여왕의 일부 후손들은 마운트배튼윈저라는 성(surname)을 쓸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왕가의 이름(family name)은 계속 House of Windsor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surname=family name이지만, 영국 왕가의 경우 앞으로 surname은 마운트배튼윈저(Mountbatten-Windsor), family name은 윈저 가(House of Windsor)라고 하여 구분하겠다는 것이다.[* 영국 왕실의 공식 설명.[[http://www.royal.gov.uk/ThecurrentRoyalFamily/TheRoyalFamilyname/Overview.aspx|#]]] 즉 성씨는 달라지더라도 왕가의 이름은 계속 Windsor로 고정된다는 뜻이다.[* 마운트배튼윈저 성을 최초로 사용한 사람은 손녀 [[루이즈 앨리스 엘리자베스 메리]]이다. 아버지의 직위와 상관없이 왕의 부계 손녀이기 때문에 루이즈는 HRH 칭호와 Princess 호칭을 사용할 수 있으나, 에드워드 왕자 부부가 자식들이 평범한 삶을 살길 바랐기 때문에 HRH 경칭을 주지 않을 것 뿐이다. '전하 (The Royal Highness)'를 받은 왕족은 보통 성을 쓰지 않고, 써야 할 상황이면 영지 이름을 사용한다. ex) 찰스 에든버러, 윌리엄 웨일즈, 조지 케임브리지.]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h9AaHAoCnkI, width=480, height=280)]}}} || || '''엘리자베스 2세 대관식 당시 영상'''[* 04:12쯤에 필립공이 여왕에게 충성 맹세를 하는 장면도 나온다.] || [[조지 6세]]의 사망과 [[엘리자베스 2세]]의 갑작스러운 즉위로 인해 평범한 가정생활과 그동안 쌓아왔던 해군 경력을 겨우 31살의 젊은 나이에 모두 포기해야만 했다. 이로 인해 즉위 초창기에 엘리자베스 2세와 갈등이 있었다고 한다.[* 필립 공이 해외 순방으로 6개월동안 여왕과 떨어져 지냈는데, 이때 [[이혼]]설이 언론을 통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버킹엄 궁 측에서 곧바로 부인했다. 또한 이는 버킹엄 궁이 사상 최초로 밝힌 왕족의 이혼설에 대한 입장이었다.] 또한 여왕의 남편임에도 여전히 무일푼 외국인 왕자라는 귀족들의 비아냥과 모욕을 듣거나 왕가의 성을 윈저로 사용하기로 하면서 귀족들 사이에서 놀림감이 되기도 했다. 결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나서서 남편 필립 공의 지위를 확실하게 정리했는데, 특히 딸을 비롯한 여계 후손들과 왕족 호칭이 안 붙는 후손들은 마운트배튼윈저란 성을 쓰게 조치했다. 심지어 자신도 아주 사적인 경우에는 마운트배튼윈저 부인이라는 이름을 쓴 적도 있다.[* 엘리자베스는 결혼 이후 즉위하기 전까지 엘리자베스 마운트배튼이라는 이름을 쓴 적이 있다.] 더불어 1953년부터 시작된 당시 에든버러 공작의 왕실 작위에 대한 논쟁 끝에 여왕은 그에게 1957년 그레이트브리튼과 북아일랜드 연합왕국 공(Prince of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 작위를 내리는 한편[* 그 외에 이 논쟁에서 후보로 거론된 작위로는 영연방 공(Prince of the Commonwealth), 대공(Prince Consort), 왕국 공(Prince of the Realm, 적절한 번역인지는 불확실), 왕공(Prince Royal)등이 있었다. 여기서 Prince Consort를 번역한 대공은 일반적인 [[대공(작위)|대공]] 작위가 아닌 유럽 여왕의 국서를 칭하는 대공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 따르면 '유럽에서, 왕가의 황태자나 여왕의 부군([[夫]][[君]])을 이르는 말'이라고 지정되어있다.], 그를 칭할 때에는 에든버러 공작, 필립공 전하(His Royal Highness The Prince Philip, Duke of Edinburgh)로 할 것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더불어 필립 공의 공식 지위가 '현저하고 우선하게 여왕 폐하 다음(Place, Pre-eminence, and Precedence next to Her Majesty)'이라고 법적으로 못을 박았다. 이로써 필립 공의 위치는 공식적으로 확립되었다.[* 1957년에 여왕이 작위를 내리기 이전에는 '''에든버러 공작 전하'''(His Royal Highness The Duke of Edinburgh)라는 호칭이 전부였다. 이는 왕족들 중 가장 높은 신분인 [[웨일스 공]](Prince of Wales)으로 책봉되어 있었던 자신의 [[찰스 3세|아들]]보다 낮은 신분이었다.] 아내 엘리자베스 2세와는 평생 금슬이 좋은 편이었다. 엘리자베스 2세가 전국민적인 사랑을 받은 데에는 남편 필립 공과의 모범적인 결혼생활도 한몫 했다. 외국에 알려진 것처럼 수십 년간 두 사람 사이에 잡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여왕이 남편의 바람기를 어느 정도 눈감아주었고, 필립 공 역시 바람은 피워도 아내에게 충실해야 한다는 본분을 잊지는 않았기 때문에, 간간히 나오는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결혼생활을 평탄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여러모로 고전적인 유형의 부부라 할 수 있다.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philip_elizabeth.jpg|width=100%]]}}} || || '''1947년 신혼여행 중 (위)[br]2007년 결혼 60주년을 맞이해 위를 재현 (아래)''' || 필립 공은 여왕의 부군이라는 위치 때문에 항상 아내보다 한발 물러서 있어야만 하는 처지에 엘리자베스 2세는 국정을 혼자 살피기 때문에[* 조지 6세와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은 정부에서 보낸 서류를 상자에 넣은 다음 꺼내서 함께 들여다 보았는데, 엘리자베스 2세는 그 상자의 열쇠를 자기만 갖고 남편에게 주지 않았다.] 정치적으로 발언권을 가지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대신 여왕을 대리해 해외를 순방[* 예를 들면 [[1956 멜버른 올림픽]] 개회식에서 [[엘리자베스 2세]] [[호주 국왕]]을 대신하여 개회선언을 했다. 한편 [[인도]]를 방문해선 [[인도 제국|영국 식민지 시절]] 학살자 추모비를 딴지걸다가, 여왕이 나중에 인도를 방문할 때 극우파들의 야유와 비웃음을 실컷 당하는 데 기여했다.]하거나 각종 학술단체 또는 자선단체의 후원자를 맡는 등 민간 활동에서 다른 왕실 가족들과 함께 얼굴 마담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를 두고 필립 공은 생전에 자신을 '''"나는 세계 최고의 현판 제막식 전문가"'''라고 농담했다고 한다. 1956년 남극 제도를 방문한 이후 자연보호에 관심을 가지고 관련된 활동을 지속적으로 펼치기도 했다. 또한 세계 자연보호 기금의 총재를 지내기도 했다. 또한 의전 서열상 [[영국군]] 최고 계급 보유자로, [[영국 육군]], [[영국 해군]], [[영국 공군]]의 [[원수(계급)|원수]] 계급을 보유하고 있고, 2011년에는 엘리자베스 2세로부터 해군 최고사령관(Lord High Admiral) 직위를 넘겨받았다. 옛날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인 [[앨버트 공]]은 마운트배튼 경처럼 외국인이었지만 빅토리아 여왕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영국 의회|의회]]의 반대로 인해 해군 제독 계급을 수여받지 못했다. 반면 마운트배튼 경은 영국 해사 출신이고 이미 본국 왕정도 없어진 상태라 큰 논란이 없었던 듯하다. 맏이이자 장남인 [[찰스 3세]]와는 어려운 관계였다고 전해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